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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 당신은 누구의 삶을 살고 있나요? 자존감 니체 

당신은 누구의 삶을 살고 있나요?

우리는 너 나 할 할것 없이 행복을 위해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화목한 가정을 위해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누군가는 의사 집안이라는 이유로 의대를 가고,

누군가는 부모의 기대로 원치 않는 공부를 시작합니다.

유교적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여 집안에 명예나 체면으로부터 우리를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유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짐을 짊어집니다.

누군가는 남자라는 이유로 울지못하고 누군가는 여자라는 이유로 당당한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유치하다는 소리가 두려워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쪼잔하다는 소리가 두려워 수시로 손해를 봅니다.

또 누군가는 소속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미디어에서는 멋진 삶이라면 갖춰야 할  모습이 방영 되고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욕망 하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 주변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당연 하듯 해야 할 일이 사방으로 쌓여나갑니다.

당연하게 추구해온 꿈조차 언젠가부터 내 바람인지 타인의 바람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경쟁과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우리는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못난 자신의 원망스럽고, 그렇게 자존감은 추락합니다.

‘왜 이렇게 밖에 못 할까?’

‘나는 누구를 위해 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나조차 나의 편이 아니었구나…’

[오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았습니다] 책은 이어서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시로 몰려오는 그 많은 물음과 한숨을 꾹꾹 누르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니 전해 주고 싶다.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신은 죽었다” 

자존감을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신은 죽었다니 무슨 말일까요?

한동안 유교,기독교 이런 것들은 우리의 도덕이었으며 존재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였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당연하듯 자신을 희생시켜왔습니다.

지금 까지 사람들이 믿어왔던 이런 것들을 니체는 신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런 신이 죽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붕괴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것들, ‘~라서 ~해야 한다’는 모든 것들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또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이제껏 듣지 못했냐?”라고. 

왜 아직 과거의 가치관과 믿음에 연연해 하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느냐고요.

니체는 신이 죽은 이 시대에,  모든 가치들이 사라져버린 세상에 스스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자, 스스로 삶의 법칙을 세우는자, 니체는 이를 ‘초인’이라 불렀습니다.

초인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주눅 들지 않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삶의 의미, 삶의 가치는 오직 스스로만이 가질수 있기에 남의 의미 남의 가치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신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관습과 의무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신의 그림자가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그림자는 우리의 진정한 욕구를 왜곡시키고 원하지 않는 삶을 당연하다는 살아가게 합니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려면, 초인처럼 세상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았습니다]는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은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사고방식인 ‘섬 사상’을 소개합니다.

간단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의 섬으로 여기면 됩니다.

나는 하나의 섬이고, 다른 사람도 하나의 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 타고난 환경과 성향 매 순간 부딪히는 경험들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간혹 다리를 놓고 교류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바로 떨어진 섬입니다.

더 간단히 얘기하면 ‘나는 나고, 너는 너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겠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 주지 않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가 가진 생각과 행동에 대해 당당해집니다.

눈치를 보거나 주눅 들 일이 없어집니다.

상대방의 생각도 맞을 수 있지만, 내 생각 역시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연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누가 나를 업신여길여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그 사람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기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게 됩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거나 반겨주기를 원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맞을수 있지만, 타인의 생각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반박하거나 틀렸다고 하지 않고, 사람의 사정을 가늠하게 됩니다.

삶을 돌아보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옭아매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족의 기대, 남자라면 여자란 어떠해야 나는 사회적 관념,

미디어에서 떠드는 좋은 삶의 조건들 까지 이런 것들이 많을 수록 당연하게,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가 충족하지 못하는 것들이 생깁니다.

그래도 사실  잘 살고 있는데 괜히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고,

남들보다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오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았습니다]를 통해 니체를 만나보세요.

옭아매는 것들을 모두 풀어버리고 삶의 의미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입법자가 되세요.

누군가 내 삶을 평가하려 든다면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말을 떠올리세요.


- 영상 소견 - 
우리는 진정 내 삶을 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상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진정 자신을 위한 삶과 결정들을 했는지 돌아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결정한 결과로 현재의 내자신이 있는 것은 맞다.
그 결정을 할때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선택을 했는지,
아니면 남이 원하는 삶을 위해 선택을 했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 해보는 시간을 갖는것이 좋을 것 같다.
본인은 어떤사람들이 참 빛나고 멋있게 보일때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삶을 살아 가자는 이말은 이기적으로 살아라 라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내 삶을 살고 싶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고 싶은 삶은 
내 삶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남이야 내알바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은 사람은 사람들 모여사는 공동체 삶에서 
그 선이 어디까지 허용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 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삶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남에게 피해가 된다는 생각 역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서로의 삶의 욕심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본 의식주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의 행동은
내삶을 선택하는데 있어 내 자신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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